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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6. 16世 〉13. <부정공>야촌공휘중망묘표(野村公諱重望墓表)
1. 문헌 목록 〉16. 16世 〉15. <부정공>통사랑선공감가감역도계공휘익신행장(通仕郎繕工監假監役道溪公諱翊臣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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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부정공>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소암공휘언신묘갈명
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官素庵公諱彦臣墓碣銘 小司徒趙公卒踰年其弟翊臣撰公行狀以屬不佞曰我伯氏官位名德俱應銘法而墓草巳宿幽誌尙闕知伯氏莫子詳子其銘之嗚呼不佞與公生同年師同門釋褐又同年出處進退大略皆同殆古人所謂姓不同兄弟每念存沒悵惘如新於斯役也何忍辭諸顧不佞識淺文拙不足以發公之重用是固辭而終不獲則遂乃披涕而滋筆焉公諱彦臣字汝輔號素庵系出淳昌鼻祖曰大將軍璋其後府院君忠獻公元吉前副正瑜仍世大顯高祖諱元弼府使 贈參判曾祖諱聖耈歷職性署以大耋資爲副護軍祖諱爾鼎 贈承旨考諱泰興星州牧使 贈參判妣貞夫人豊山洪氏縣監 贈左贊成柱天之女以 肅廟壬戌生公幼聰慧學語便知讀書八歲誦詩經聲若出金石參判公喜曰此奇才可大受時吾叔父儉齋府君罷官閒居以文行敎後生遂携公往托俾與府君子姪同學未幾文理驟長府君大奇之府君家素貧居養非穉弱所堪而參判公割愛忍惻屢年不還俾卒成就人以爲難庚寅選上庠仍闡文科吾從兄弟並以齠齡伴與公同爲登第而年皆二十九聞者嗟異分隷槐院前後屢躡堂右以善記注稱出爲自如道察訪捐俸賑郵卒尋病免還槐院序遷至博士兼奉常寺直長轉議政府司錄遂陞成均館典籍乙未以禮曹佐郞移拜司諫院正言後入講院爲文學上有未豫之敎於東宮仍命東宮代理公憂歎曁僚上疏請收筵敎之失當又上書東宮勉誡懇至東宮亦納其誠兼春館差備局郞戊戌陞弼善乞暇省親于湖邑上書陳沿路飢癘狀請停俸糶籥丁預講賑救批旨稱善令諸道依施改掌令上書論事一曰釐軍丁以亟變良役積弊爲國家祈永之本二曰裕民財極言奢侈之害請自宮中示節儉爲臣民先三曰正朝廷以爲朝廷者四方根本朝廷和而後天地之和應之而近見士類之間疑沮轉深議論層生不思鎭定調和反爲激發譸張其亦不仁甚矣時臺臣成震齡倡攻趙忠翼泰采語甚慘 礮朴致遠諸人和之小有違之隨輒駁擊勢如河決末流之憂甚大故公疏及之歷獻納司諫己亥遷輔德庚子 肅廟賓天公見時事大變盡室寓春川尋移忠州甲辰 景廟薨今上嗣位乙巳以輔德召還世子冊禮成例陞通政除同副承旨親乞郡授密陽府使上任疏陳民瘼數條飢渴亂哺一境風勤繡衣道臣並以治最聞有賜馬之恩丁未棄官民旣攀轅不得則相與立祠祭之戊申春逆變作移奉大夫人於峽村即發奔問之行道拜淸州牧使賊仁佐己陷淸州務兵使營將刦略嘯聚徒黨指日北上列邑披靡公夷然拜命上引見勉諭以送比至州亂甫平餘孽尙多嶺賊踵起人心數驚公爲文曉以逆順勉安闔境趍令筵臣宋寅明等啓曰趙某宜參從勳而獨漏可惜上以錄巷巳成難於追添命賜廐馬庚戌拜刑曹參議遞拜慶州府尹有親嫌不赴以淸州時褒進秋嘉善辛酉拜漢城右尹壬子遷戶曹參判癸丑五月得疾竟以二十六日卒于玄江寓舍訃聞命有司賜祭賻如儀朝臣士庶一辭恫惜朋友爲之加麻八月葬于高陽大哉洞長靈山元配墓右庚申十一月改葬于舊壙之西麓負辛之原繼配先葬其右故合墓元配豊川任氏判決事堂之女柔嘉貞淑婦德甚備有一女繼配廣州李氏鰲川君世章之女三配南陽洪氏震夏之女公無子取翊臣之子宗溥爲嗣淸明好學式穀似之女適進士李義淳曰允矣趙公襮順裹貞早得賢師如琢以成文辭之美行誼之篤蓄銳射科一發再鵠騫于侍從剴切封奏試之民社澤流悠久公性簡恬終盤巳自守人競馳我輒在後歛其雋才知者盖鮮及遇盤錯利器乃見駸駸嚮用廷望愈歸公不少待擧世嗟悲貳卿非屈處散奚施五旬非夭稱德則否然公事蹟自足不朽凝川繪像尙泣耆耈琅城莅功書在史氏不嬴之報可徵後嗣 淸風 金在魯 撰 領議政晴沙 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소암공휘언신묘갈명 (嘉善大夫户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素庵公諱彦臣墓碣銘) 소사도(小司徒) 조공(趙公)이 별세한 다음 해에 그 아우 익신(翊臣)이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부탁하되 「나의 백씨 관위와 명덕(官位名德)이 함께 명법(銘法)에 합당하온데 무덤에 풀이 다 자라도록 유지(幽誌)를 기록하지 못하였으니, 우리 백씨를 자네만큼 자세히 아는 이가 없으니 자네가 좀 지어 주게」한다. 아! 내가 공으로 더불어 동년생(同年生)이요, 동문학(同門學)이며 또 같은 해에 초사(初仕)하여 출처진퇴(出處進退)가 대략 같으니, 자못 옛 사람이 이른 바 성이 다른 형제라, 매양 사생을 생각할 때 애절한 마음이 새로운데 이 일을 어찌 차마 사양하리오 마는 돌아보건대 내가 지식이 천박하여 족히 공의 성망(聲望)을 발양(發揚)할 수 없어 굳이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얻지 못하고 이에 눈물을 흘리며 붓을 들었다. 공의 휘는 언신(彥臣)이요, 자는 여보(汝輔)이며, 호는 소함(素庵)이고 순창인으로 전부정(前副正) 건곡공(虔谷公) 휘 유(瑜)의 후예로 고의 휘는 태흥(泰興)인데 성주목사로 증참판이요, 비는 정부인 풍산홍씨(豊山洪氏) 현감 증찬성 주천지녀(縣監贈左贊成柱天之女)이다. 공이 숙종 임술(一六八二)년에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말을 배우며, 글을 읽을 줄 알고 八세에 시경(詩經)을 외우는데 소리가 금석(金石)소리 같으니, 참판공이 기뻐하며 이는 기특한 재주이니 장차 크게 될 것이라 하였다. 때에 나의 숙부 검재부군(儉齋府君)이 벼슬을 사면하고 한가이 지내며, 학문과 행의로써 후생을 교도하니 드디어 공을 데리고 와서 부탁하여 부군 자질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였다. 얼마 안되어 공의 문리(文理)가 크게 진취하니, 부군이 기뻐하였고 부군 가정이 심히 가난하여 어린이의 양육을 감당 할 수 없으므로 참판공이 보조하고, 측은한 마음을 참고 여러 해 공부를 계속케 하여 마침내 성취하니, 사람으로써 이와 같은 일은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경인(一七一○)년에 태학(太學)에 뽑혀 문과에 오르니, 우리 종형제가 다 八세 서당동무로 공으로 더불어 함께 급제하니, 그때 나이가 모두 二十九세라 듣는 자가 차탄(嗟歎)하였다. 괴원(槐院)에 나누어 부록하여 전후 善기주(記注)로 칭도받았고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으로 나와 녹봉(祿俸)을 떼어 역즐을 구률하고 병으로 사직하였다. 다시 괴원(槐院)으로 돌아와 차서로 박사(博士)에 옮겨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을 겸직하다가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에 전직하여 드디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올라 을미(一七一五)년에 예조좌랑(禮曹佐郎)에 전직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배수하였다. 뒤에 강원(講院)에 들어가 문학(文學)이 되었는데, 상(王)이 편안치 못한 교지를 동궁(東宮)에 내리고, 인하여 동궁으로써 대리를 명하니 공이 근심하고 탄식하여 동료로 더불어 상소하여 부당한 연교(筵敎)를 거두라 청하고 또 동궁께 글을 올려 계도(誡道)하는 등 그 정성이 지극하니 동궁이 또 그 정성을 받아들여 춘관차비국랑(春館差備局郎)을 겸하게 하였다. 무술(一七一八)년에 필선(弼善)에 올라 휴가를 얻어 호읍(湖色)의 어버이를 귀성(歸省)하며, 글을 올려 연로(沿路)에 주리고 병든 형상을 진달하고 약정(籥丁)의 급미(給米俸糶)를 정지하고 미리 기민을 먹여 구원하라 청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시고 모든 도(諸道)에 분부하여 시행하였다. 장령(掌令)이 되어 글을 올려 일을 의논하되 一은 군정(軍丁)을 다스려서 양민(良民)의 적폐(積弊)를 변통하여 국가무궁(國家無窮)의 근본을 삼고 二는 백성의 재산을 여유있게 도모할 것이며, 사치스러움의 해를 극렬히 비판하고 궁중에서 시민보다 먼저 절검할 것을 간청하였으며, 三은 조정을 바르게 함이니 조정은 모든 것의 근본이라 조정이 화합한 연후에 천지의 화기가 응한 것인데 근자에 보면 사림(士林)들 사이에 의구심을 조장한 의론이 거듭 발생하여 진정조화(鎭定調和)될 기미가 없고 도리어 격동 과장되니 이 또한 심히 불인(不仁)하다 하였다. 때에 대간 성진령(臺諫成震齡)이 조충익태채(趙忠翼泰采)를 불러 공격하며 말이 심히 흉악하고 박치원(朴致遠)등이 호응하여 반대한 자가 있으면 여지없이 공격하니, 그 형세가 충천하여 진정하기 어려우므로 공이 상소하였다. 헌납사간(獻納司諫)을 지내고 기해(一七一九)년에 보덕(輔德)에 옮겼는데 경자(一七二○)년에 숙종(肅宗)이 승하(昇遐)하니, 공이 시사(時事)가 크게 변할 줄 알고 가권을 이끌고 춘천(春川)에 우거(寓居)하다가 충주(忠州)로 옮겼다. 경종(景宗)이 훙(薨)하고 금상(今上)이 대위(大位)에 올라 을사(一七二五)년에 보덕(輔德)으로써 소환(召還)하고 세자 책봉이 되니, 계질(階秩)에 따라 통정(通政)에 올라 동부승지를 제수하였는데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外職)을 원하여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제수받고 부임하면서 상소하여 백성의 병폐(病弊) 몇 가지 조목을 진달하고 기갈(飢渴)을 구제하니 온 고을이 모두 칭송했다. 어사와 도신(御使道臣)이 함께 치적(治蹟)을 주달하여 말을 하사한 은전이 있었고(有賜馬之恩) 정미(一七二七)년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니 백성이 말 멍에를 휘어 잡고 길을 막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서로 더불어 생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무신(一七二八)년 봄에 역변(逆變)이 일어나니 대부인(大夫人)을 산 마을에 옮겨 모시고 곧 분문(奔問)의 길을 떠났는데 중도에서 청주목사(清州牧使)에 배명하였으나 적인좌(賊仁佐)가 이미 청주를 함락하고, 병사(兵使)와 영장(營將)을 약탈하며 도당(徒黨)을 불러 모아 날을 가르치며 북으로 올라 가니, 지나는 고을마다 쓰러지고 진동하되 공이 명을 받들어 평온하게 하니, 상께서 인견(引見)하시고 힘써 설유하야 써 보내다. 차례로 고을에 이르니, 난이 겨우 진정되었으나 아직 잔당이 많고 산도적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므로 인심이 자주 경동(驚動)하니 공이 화순한 마음을 가지고 힘써 안도하라 글을 써 효유(曉論)하니 온 경내가 숙연청령(肅然聽令)하였다. 연신 송인명(筵臣宋寅明)등이 주장하되 조모가 원종훈(原從勳)에 참여 한 것이 당연한데 홀로 누락되었음을 가석하다 하니, 상(王) 록권이 이미 작성되었으므로 추서(追叙)가 어렵다고 명하여 어구마(御廐馬)를 하사하고 경술(一七三○)년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배명하고 경주부윤(慶州府尹)에 다시 배명하였으나, 칭병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청주 목사때 포상(褒賞)으로 가선질(嘉善秩)에 올라 신유(一七四一)년에 한성부윤(漢城府尹)에 배명되고 임자년에 호조병조참판(戶曹兵曹參判)에 배명되었으나 계축년 五월에 병을 얻어 마침내 현강우사(玄江寓舍)에서 별세하니, 그 날이 二十六일이었다. 부음(訃音)을 들으매 유사(有司)를 명하여 제전(祭奠)과 부의(賻儀)를 하사하시고 조신사서(朝臣士庶)가 통석(恫惜)하고 붕우(朋友)는 삼옷을 더 하였으며, 八월에 고양 대재동 장령산(高陽大哉洞長靈山) 원배묘 우축(元配墓右側)에 장사하였다가 경신년 十一월에 구광의 서쪽(舊壙之西) 신좌(辛坐) 언덕에 개장(改葬)하니, 계배(繼配)를 먼저 우측에 장사하였으므로 합묘(合墓)하였다. 원배(元配)는 풍천임씨 판결사당의 녀(豊川任氏判決事堂之女)로 유가정숙(柔嘉貞淑)하야 부덕(婦德)이 심비(甚備)하고 一녀를 두었으며 계배(繼配)는 광주이씨 오천군 세장지녀(廣州李氏鰲川君世章之女)요, 三배(配)는 남양홍씨 진하지녀(南陽洪氏震夏之女)였다. 공이 아들이 없어 익신(翊臣)의 아들로 후사를 삼으니 청명호학(清明好學)함으로 잘 가르쳐 착한 사람이 되었고, 녀는 진사 이의순(李義淳)의 처였다. 명에 쓰기를, 성실한 조공은 외모가 온순하고 내심이 정직 하도다. 允矣趙公襮順裏貞 일찍 현사를 얻어 탁마하여 성취하니 早得賢師如琢以成 문사가 아름답고 행의가 이에 순독하였다. 文辭之美行誼之篤 예리하게 축적하고 과장에 나가 한번 일어나 적중하였도다. 蓄銳射科一發再鵠 시종으로 뛰어 올라 간절하게 봉주하고 騫于侍從剴切封奏 백성을 다스리매 은택이 유구하였다. 試之民社澤流悠久 공의 성정이 간결하여 종반에 스스로 그만두고 公性簡恬終盤巳自 사람들은 다투어 달리는데 나만은 뒤에 가네 守人競馳我輒在後 그 큰 재주를 감추어 아는 자는 적으나 歛其雋才知者盖鮮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날카로운 그릇을 이에 보이는도다. 及遇盤錯利器乃見 거침없이 등용되니 조정의 신망이 두터웠으나 駸駸嚮用廷望愈歸 공이 조금 기다리지 아니하니 온 세상이 슬퍼하였다. 公不少待擧世嗟悲 二경에 굴하지 아니하니 처하고 헤어짐을 어찌 옮기겠는가 貳卿非屈處散奚施 五十이 요사는 아니되 덕이라 이르기는 부족하다. 五旬非夭稱德則否 그러나 공의 사적이 자족하고 썩지 아니하니 然公事蹟自足不朽 광중에 어린 화상이 오히려 늙은이를 울리는도다. 凝川繪像尙泣耆耈 랑성에 끼친 공은 청사에 남으리니 琅城莅功書在史氏 약해 빠지지 않은 보답이 가히 후사에 미치리로다. 不嬴之報可徵後嗣 청풍(清風) 김재로(金在魯)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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